드라마터그의 글

깨지도 들지도 않은 잠

드라마터그 최세리

 디지털 세상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면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곳이 여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
 모든 것이 디지털 속에서 영원히 저장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억에만 남은 일들은 존재가 흐릿해졌다. 그에 비하면 디지털 속 우리가 경험한 것은 모두 데이터로 저장되고 수치화되며 어딘가에 남아있다. 우리가 비트(bit)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살아온 삶보다 더욱 현존하는 디지털 속 자아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코드네임 템페스트>의 모든 장치는 중첩의 경험 안에서 디지털상의 자아와 실재 자아를 서로 뒤섞고 공존시킨다. 이 경험은 <템페스트>의 대사로 끝이 나며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생을 ‘이상한 잠’의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데, 잠은 지속되는 삶임과 동시에 삶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디지털 사회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다시 쓰는가"
 
 새로운 개념을 마주했을 때 이미 쓰인 모든 역사가 뒤집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디지털의 등장 이후 지난 삶을 헤집어 느슨한 지점을 짚어내고 결국 디지털 안에서만 실제로 살아있을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할까? 영원하며 완전한 것만이 우리의 시간을 증명할 수 있는 걸까?
 기억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나 스스로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밀려 들어오는 디지털 세상 안에서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내가 벌어질 것이라 상상했던 것들이 모두 실체를 잃어버리면서 디지털은 더욱 실제처럼 보이고, 그 무한한 순환고리 안에서 우리는 아득함을 마주한다.
 결국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길을 잃은 순간, <코드네임 템페스트>는 모든 것을 연극에 비유하면서 동시에 연극으로 돌아온다. 배우가 배우임을 드러내고 이 모든 게 실은 연극임을, 비유적으로 활용하는 연극의 속성 너머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장면임을 이야기한다. 이미 짜여지고 수십 번 반복되며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연극 연습과 제작 과정에 있어서 가상과 실제의 경계는 흐려진다.
 관객을 포함한 모든 참여자가 가상의 서사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다시 쓰는 동시에 배우가 극장이 아닌 곳에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을 뒤집는다. 건축가의 이야기 안에서 폐공장은 중첩의 공간이 되고 배우의 몸을 통해 공간이 연극의 안으로 편입된다.
 중첩의 공간에서 우리는 건축가를 만나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가 만들어낸 세계를 구경하지만 동시에 감시당하며 극의 말미에 이르러 피조물로 재창조된다. 관람객으로서의 창조 경험이 결국엔 디지털 속에서 다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창조와 피조의 사이에서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계속해서 뒤집어지고 새로 쓰이는 경험의 우로보로스처럼 실제와 디지털이 계속해서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며 서로를 감시하고 모방한다. 결국 무엇도 실재한다고도 부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템페스트 속 마법이 실제와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어낸 것처럼 <코드네임 템페스트> 속에서는 기술이 마법과 궤를 같이한다. 생생한 삶인 것처럼 느껴지는, 너무나도 우리의 곁에 밀접하게 도착한 디지털이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뒤집는다. 나의 것이라고 명백하게 믿어왔던 세상이 뒤집어지며 이제 지나온 시간이 모두 누구의 것도 아닌,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된다. 기술로 만들어진 마법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세계가 가상의 안으로 편입되고, 타자의 존재를 의심하고, 그 너머 자신의 존재까지 의심하게 되는 디지털 세상이 우리의 앞에 펼쳐지고 있다. 최종적으로 <코드네임 템페스트>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문하게 만든다.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의 생을 어떤 모양으로 이어가야 할까?‘

 가상의 안에서도 우리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사실만은 명확하다. 우리의 존재가 여기에 있었다. 그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억뿐이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연극이 벌어졌다. 지금 여기에 삶이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다시, 배우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그 장면은 연극에서 이미 짜여진 장면이므로 다시 가상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건축가 너머 날 것의 배우를 마주친다. 그리고 또다시, 이 배우의 몸과 이야기 역시 이미 쓰여진 것을 반복하며 촘촘하게 계산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만약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했을 때 무엇을 가짜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영원한 것을 꿈꾸는 게 아니라 가상의 안에서도 우리가 삶을 살아냈음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이제 모든 경계는 흐릿하다"
 
 실체 없는 것이 실제의 삶에 가까워지면서 실재는 자리를 잃는 것일까? 우리가 발 딛고 선 공간과 장소들이 모든 의미를 잃게 될까? 아직 명확하지 않은 중첩의 세상 안에서 우리는 자문해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있다. 다만 우리의 삶이 이뤄지는 공간을 우리 삶의 무대라고 할 수만 있다면 기술과 연극, 디지털 공간 역시 모두 우리의 무대가 된다. 템페스트의 무대가 확장되며 마법이 우리의 삶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아직 제대로 깨지도, 들지도 못한 잠에서 우리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